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아명은 도미노미야(富宮). 초명(初名)은 '나루노리'(成憲)이었으나, 후에 아사히코로 고쳤다. 이복형인 아키라 친왕과는 대립관계였다. 20대 중반에 [[가마쿠라 막부]] 시대 말기에 건립되어 대대로 황족이 주지승려[* [[승려]]라지만 모두 대처승이라, 아내와 자녀를 둘 수 있다.]을 맡았던 [[교토]]의 [[절(불교)|절]] 쇼렌인(青蓮院)[* 하필 많고 많은 [[교토]]의 [[절(불교)|절]]들 중에서 왜 쇼렌인인가 하면, 사실 이 쇼렌인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사람~~그 당시 주지승려는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다~~이 바로 아사히코 친왕의 외할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. 아사히코 친왕의 어머니는 구니이에 친왕의 첩 노부코(信子)였으며 쇼렌인의 관리자 도리이코지 쓰네치카(鳥居小路経親)의 딸이었다. ~~외할아버지의 후광~~]의 주지승려가 되었으며, ~~새파란 녀석이 벌써 주지??~~ 법명은 손유우(尊融)로 명명받았다. 그래서 처음의 [[미야고]](궁호)는 구니노미야가 아니라 쇼렌인노미야(青蓮院宮)이다. 일단 여느 황족들처럼 승려가 되긴 하였지만, 원체 경건한 사원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활발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에, 많은 말썽을 일으켰다고 한다. ~~맏형과 똑같다. 단 맏형은 대상이 고모(...)고 이 사람은 대상이 사원에서 봉사하던 무녀(...)다. 이거나 저거나 도토리 키재기, 매한가지다.~~ [[쿠로후네 사건|미국의 흑선(黑船, 구로후네)이 일본에 내항]]했을 때, [[에도 막부]]는 교토 조정에 이를 알리지도 않은 채 미일조약을 일방적으로 체결해버렸다. 그래서 교토 조정의 수많은 보수, 수구~~꼴통~~적인 성격을 지닌 왕족, 구게(公家)들이 조약 체결에 반대하고 항의했으며, 이 흐름의 중심에 바로 아사히코 친왕이 있었다. 한편으로는 당시 [[에도 막부]]의 13대 [[쇼군]](將軍) [[도쿠가와 이에사다]](德川家定)가 죽었기 때문에 후임 쇼군을 선출해야 했는데, 막부의 다이로(大老)인 [[이이 나오스케]](井伊直弼)를 비롯해 그 외 막부의 여러 인사들은 기슈 번(紀州藩)의 도쿠가와 요시토미(德川慶福)를 지지했고, 아사히코 친왕을 비롯한 여러 존왕양이(尊王讓夷)파들은 미토 번(水戶藩)의 [[도쿠가와 요시노부]](德川慶喜)를 지지했다. 이 와중에 막부의 실세였던 [[이이 나오스케]]는 아직도 교토 조정에 비해 강하기 그지없었던[* [[메이지 유신]] 이전까지만 해도 막부의 쇼군 허락 없이 [[천황]]이 혼자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. 예를 들어, 119대 천황이였던 [[고카쿠 덴노]]는 천황의 자식이 아닌 방계 황족([[간인노미야]])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[[간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]]에게 덴노의 칭호를 추존(追尊)하려고 했으나, 막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. 그래서 [[고카쿠 덴노]]는 칭호를 올리지 못했고 ~~결국 죽었다.~~ 이는 막부가 없어진 후인 증손자인 [[메이지 덴노]] 시기에 스케히토 친왕에게 '교코(慶光) 덴노'라는 칭호를 올림으로써 이루어졌다. 이처럼 천황은 막부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, 마치 허수아비와도 같았다.] 막부의 권력을 이용, 요시토미를 밀어붙여 14대 쇼군으로 만들고[* 요시토미는 쇼군이 되고 나서 역대 쇼군의 통자(通字)인 '가(家)' 자를 써서 이름을 '이에모치'(家茂)로 바꿨다. ('통자'란 일본에서 자손 대대로 이름에 넣는 한자이다.)] '안세이(安政)의 대옥(大獄)' 사건을 일으켜 조정의 구게들, 강력한 존왕양이를 주장했던 [[조슈 번]](長州藩)의 여러 [[무사(역사)|무사]]들을 비롯한 수많은 존왕양이파들이 처형, 투옥, 유배형에 처해졌다.[* 존왕양이파의 사상적 지도자, 일본 우익사관의 창시자라고도 할 수 있는 [[조슈 번]]의 무사 [[요시다 쇼인]](吉田松陰)은 이 때 막부의 군대에 붙잡혀 처형당했다.] 아사히코 친왕도 이 피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. 대신 그는 방계 황족이라는 신분을 참작하여, 조정에서의 발언권을 박탈당하고 은거하는 것으로 끝났다. 그러나 1860년에 [[이이 나오스케]]의 폭정에 강한 불만을 품은 존왕양이파들이 [[사쿠라다 문 밖의 변]]을 일으켜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함으로써 아사히코 친왕도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, 이후 미야고를 나카가와노미야(中川宮), 가야노미야(賀陽宮)[* 거처 주위에 비자나무(榧)가 많이 자라서 '榧'의 독음인 'かや'를 음독으로 바꿔서 길한 말인 '賀陽'으로 바꿨다고 한다. 뒤에 구니노미야로 바꾼 후 차남인(장남은 요절) 구니노리(邦憲) 왕이 미야고를 가야노미야로 칭했다. 이때 왜 실질적으로 장남인 구니노리 왕이 구니노미야의 차대 당주가 되지 못했냐면, 그는 건강이 영 좋지 않아 40대에 죽었기 때문이다. 그래서 바로 아래의 이복 남동생인 구니요시(邦彦) 왕이 구니노미야의 차대 당주가 되었다. ~~양보~~]를 거쳐, 1875년 최종적으로 구니노미야로 고쳤다. 그후 천황의 조언자로 활동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